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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15일 Facebook 두 번째 이야기

유근주 2012. 9. 1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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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였던 서경석 목사가 왜 지금 보수가 되었나?  
     
    안녕하세요. 저는 65세의 중늙은이 서경석 목사입니다. 저 같은 60대는 이러다가 나라가 종북좌파(북한추종세력)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저 같은 사람을 꼴통보수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고 이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도 한나라당(새누리당)은 싫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꼼수에 환호하고 결과적으로 나라가 좌파 손에 넘어가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나이든 사람들이 이토록 나라를 걱정하는지를 제 이야기를 통해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2. 대한민국에서 황당한 일이…  
     
    어떤 분이 제게 <미꾸라지 진짜 용된 나라 대한민국>이란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우리나라가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SONY를 포함한 일본의 10대 전자회사가 낸 흑자를 다 합쳐도 삼성SDI가 낸 흑자보다 못하고 세계 TV판매의 1,2등은 삼성과 LG이고 인천국제공항도 6년 연속 세계최우수공항상을 받았고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17조원으로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를 넘어섰고 IT기업 중 세계1위가 되어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사와 1,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또 한국은 세계2위의 철강대국이고 세계10대 경제대국입니다. 아프리카 53개국의 연간 GDP가 6천억불인데 한국의 연간 GDP는 6천7백억불로 아프리카 전체보다 많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김정은으로 3대세습을 했고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금수산 궁전을 짓는 동안 3백만명이 굶어죽었고, 김정일 상중(喪中)에 탈북하면 3대를 멸족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년 6월30일 수원지방법원 제410호법정에서 종북(從北)까페인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 운영자인 황길경 피고는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으면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외쳐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 작년 8월 20일 서울시청 앞에서 보수 대학생단체가 북한인권문제 다큐멘타리 영화 '김정일리아'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좌파시위대 4천명이 서울광장으로 몰려와 전선을 끊어 이 영화의 관람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종북좌파 정당인 통합진보당은 지금 원내교섭단체를 꿈꿀 만큼 세력이 강대해 졌습니다.  
     
    3. 왜 한국에서 종북좌파 세력이 강대한가?  
     
    이 이유를 알려면 과거 민주화운동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당시 민주화를 이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학생세력이 대부분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혹독한 군사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세력은 강고한 투쟁을 하기 위해 흑백논리로 무장해야 했는데 한국상황에 맞는 논리가 없었기 때문에 학생운동권은 이 논리를 맑스 레닌주의, 김일성 주체사상, 마오이즘 등에서 차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운동 안에서는 민중신학이라는 흑백논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 주체사상론(NL)이 맑스레닌주의(PD)보다 훨씬 더 유연했고 그 결과 NL파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대항쟁 때 한국을 민주화시킨 세력이 바로 이 從北좌파세력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종북좌파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아직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시절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승리의 경험을 한 사람은 氣가 셉니다. 이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시민운동을 좌파로 만들고, 교사가 되어 전교조를 만들고, 노동자가 되어 민노총과 민노당을 만들고 기자가 되어 언론노련을 만들었으며 학계, 정관계, 법조계로 진출했습니다. 이들은 규모도 3-40만명이 되는 대한민국 최대의 세력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反美, 反韓 투쟁을 전개해 왔습니다. 미순이 효순이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반대운동, 맥아더동상 철거사건, 평택 미군철수투쟁, 한미FTA 반대투쟁, 광우병 촛불시위, 제주도해군기지반대투쟁, 희망버스 등 대한민국을 흔드는 운동을 전부 주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통합당도 말 바꾸기를 하면서까지 이들의 영향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6.25때 대한민국을 구해준 미국을 적대하고 6.25를 일으킨 북한의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4. 나도 친북좌파였다.  
     
    제가 왜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하는가? 저도 젊은 시절 친북좌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CCC 경제복지회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씨를 만나 그분으로부터 사회주의 비밀지도를 받았고 그 결과 사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혁당사건이 터지면서 박성준 선배는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고 저는 잡혀갔다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계방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유신체제와 싸우다가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았고, 산업선교 활동을 하다가 YH사건과 동일방직사건으로 두 번 더 노동자와 함께 감옥에 갔습니다. 이러한 민주화 투쟁 속에 있으면서도 제 사고의 틀은 여전히 사회주의였습니다.  
     
    1982년 저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88년까지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교포사회에서 는 북한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한주일간 방문하는 사람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가다 아들 집에 한 달간 머물다 온 노인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뉴욕 부르클린 한인교회에도 그런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한 밤중이면 아들과 단둘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들로부터 북한의 진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할아버지가 제게 아들이 들려준 북한의 진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거짓으로 가득 찬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서야 미망(迷妄)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더 이상 어두운 뒷골목에서 음모가(陰謀家)의 삶을 살지 않고 햇볕이 내리 쪼이는 개명천지(開明天地)에서 맑은 대기를 호흡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88년초에 귀국해서 운동권의 연구기관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서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원에서 파악해보니 일반 학생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학생운동까지 전부 김일성 주체사상파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단체의 성명서들도 전부 북한방송을 베낀 것이었습니다. 대학 캠퍼스를 가면 “미 제국주의자의 각을 뜨자”는 식의 충격적인 구호가 난무했습니다. 저는 처음 6개월간 후배들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내가 이들을 의식화시켜 진보운동을 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 이들이 주사파가 된 데에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운동권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후배들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기독교운동은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해야지, 주체사상론에 입각해서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후배 한 사람을 몰래 불러 사회주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화근이 되어 후배들이 저를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직에서 내쫓는 운동을 했고 결국은 진보기독교 진영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 시작한 운동이 경실련이었습니다.  
     
    저는 경실련을 시작하면서 운동권의 운동방식을 전부 뒤집었습니다. 운동권이 사회주의를 지향할 때 경실련은 시장경제체제를 주장했습니다. 운동권이 비합법운동을 할 때 우리는 합법운동을 주장했습니다. 운동권이 민중운동을 하면 우리는 보통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민운동을 했습니다. 운동권이 계급투쟁을 할 때 우리는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했습니다. 운동권이 기업을 적으로 돌릴 때 우리는 기업가와 노동자를 합쳐 생산자계층이라고 한다면 생산자 계층의 편에 서서 불로소득 계층을 비판했습니다. 경실련이 주장한 경제정의는 평등이 아니라 사람들이 균등한 기회를 누리며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실련의 노선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경실련이 창립된지 5년이 지난 94년에는 경실련이 한국 사회운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94년에는 남아있던 재야운동이 시민운동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범한 단체가 <참여연대>입니다. 그 후부터 시민운동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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